원양어선 잡캐의 잉여라이프 EP01 - 잡캐의 쓸모를 찾아서

By jeje | May 30, 2018

EP.01 잡캐의 쓸모를 찾아서


사족을 좀 달아봅니다


벌써 아득한 2015년 12월 말, 원양어선에 입사하고나니 다짜고짜(?) 블로그를 만들어 운영하자는 기술이사님의 오더가 떨어지고, 여차저차 워드프레스에 블로그를 파서 운영한 것이 엊그제같은데. 나는 왜 벌써 입사 3년차인가 왜 벌써 2018년인가 아니 왜 벌써 2분기가 가버렸나 새삼스럽게 곱씹어보는 주말 저녁입니다. 블로그를 운영한지도 3년차라니, 시간 흘러가는 속도 실화인지 ㅇ<-<

야금야금 써둔 글을 하나둘 올려볼까 하드를 뒤적거리니 개똥같은 의식의 흐름만 수두룩해서 이걸 올려말아 심하게 고민하였으나… 기술적인(?) 의식의 흐름(?) 콘텐츠는 계속 올라올텐데, 콘텐츠의 다양성 확보를 위해 이런 시리즈 하나쯤 올려도 되겠지 싶어서 그냥 올리기로 결정했습니다.



아니 지금 이걸 말이라고…

그래도 원본을 올리기엔 양심이 허락하지 않아서, 꼴에 정제라는 것을 해서 하나 둘 올려 보려고 합니다.
원양어선에 이런 쓰잘데기 없는 생각을 하고 사는 사람도 있구나, 하고 잠자기 전에 가볍게 이불 속에서 읽을 수 있는 시리즈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잡캐로소이다


이따위의 조잡한 글을 모아둘 시리즈 이름을 <원양어선 잡캐의 잉여라이프> 로 지었으니, 오늘은 잡캐라고 쓰고 나의 정체성이라고 읽는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온라인RPG 좀 즐겨보신 분들은 다들 아실텐데-, 잡캐라는게 쉽게 말하면 잡종캐 로, 한마디로 주력 스킬 없이 이거저거 찍은 캐릭터를 말합니다. (보통 망캐라고도 합니다)



잡캐 예외. 잡캐계의 끝판왕, 잡캐계의 우상(?) 힘법사 간달프

저는 나름대로의 인생을 이것저것 얕고 잡다한 수집 욕구를 실천하고 살아온 잡캐입니다.

대학 다니던 스물한두살때 취업설명회 가면 압정형 인재-자신의 전문분야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면서 폭넓은 교양을 가진 사람-를 원한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던 것 같은데, 저는 원양어선 들어오고도 컴퓨터 계속 해야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면서 눈앞에 닥친 일 하느라 바쁘던 사람이었기 때문에(그렇다고 지금은 아니라는건 아닙니다), 압정형은 아니고 굳이 따지자면 그냥 한일형(一) 인간 쯤 되는 것 같습니다.

종종 내 인생이 언제부터 잡캐 루트를 타게 된건가, 곰곰이 생각 해 보곤 합니다.
제 잡캐인생을 메이플로 비유하자면, 도적에게 필요한 행운luk을 4로 뽑아놓고 도적으로 전직한 뭐 그런 꼴인 것 같습니다.
(물론 요즘 메이플에서는 주사위 같은거 안 굴립니다… 옛날사람ㅠㅠ)



옛날옛적 메이플 주사위 스텟

저는 뭐든 쉽게 질리고, 하나를 진득하게 하기 어려워 하고, 목표지향적인 사람도 아닙니다.
딱히 승부욕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때 그때 가장 하고싶은 것들을 하고 살았는데, 덕분에 인생 너무 막 사는거 아니냐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잡캐로 살아가는게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고, 내가 해서 즐거운거 하고 살겠다는데 왜들 그렇게 오지랖들이 넓은지 싶어요.
인정합니다. 보통 게임에서는 어정쩡하게 이것저것 스킬을 많이 찍은 잡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죠.
그런데 인생을 게임에 투영 해 볼 수는 있어도, 인생이 게임은 아니잖아요? ㅇ<-<

이렇게 생각하며 나름 즐거운 인생을 살고 있던 잡캐가, 어째서, 잡캐의 “쓸모”를 고민하며 번뇌하게 되었을까요?



좋아하는 것 vs 잘하는 것 vs 잘 하고 싶은 것


보통 잡캐의 번뇌는 잘 하고 싶은 것이 생겼을 때, 그리고 그 잘 하고 싶은 것이 좋아하는 것도, 잘 하는 것도 아닐 때,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부터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는 것을 일반적으로 ‘방황’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좋아하는 것과 잘 하는 것과 잘 하고 싶은 것이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몇번이고 고민했던 시간이 있습니다.
좋아하니까 잘 하게 되고, 잘 하게 되니까 더 잘 하고싶고. 뭔가 엄청 이상적인 선순환구조 같달까.
내가 못가진거라서 좋아보이는건가, 막상 좋아하는걸 업으로 삼으면 일이 되어버려서 안된다는 말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지만,

여하튼.

잡캐의 취미는 보통 얕고 넓죠. 저의 경우도 그랬습니다. (사실 따지고보면 넓지도 않긴 하지만)
딱히 컴퓨터를 잘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는데, 역시 사람은 환경이 중요하다고- 주변에 컴퓨터 잘하는 사람이 많으니 덩달아 나도 잘 하고 싶어지더라고요.
그리고 그 사람들을 주의깊게 관찰해본 결과, 아 진짜 나 컴퓨터 해야돼?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방황의 시작이 그렇습니다.
(사실 이따위 글을 쓰고 있는 걸 보니 아직 방황이 완벽하게 끝난 거 같진 않음)

너무 당연한 사실이지만, 그 굇수님들이 컴퓨터를 잘 하는 이유는 습관처럼 컴퓨터를 공부하니까-라고 생각합니다.(물론 타고난 분도 계실테고, 아무튼 여러 요소들이 있겠지만, 여기서는 그걸 하나하나 따지고 넘어가자는건 아니니까! 일단 넘어갑시다!)

아무튼, 가지각색의 취미생활로 여가생활을 보내고 있는 저와 달리 그 분들은 숨쉬듯이 컴퓨터를 하고 있는 것이죠…ㅇ<-<



저게 가능해? 이런 느낌이었음

누구나 숨쉬는건 까먹지 않죠. 그리고 숨쉬는거 잘 합니다. 왜? 맨날 숨 쉬고 있으니까.
마찬가지로, 숨쉬듯이 컴퓨터 하면, 컴퓨터 안까먹습니다. 잘 합니다. 왜? 맨날 컴퓨터 하고 있으니까…..새삼 당연한 진리를 이십대 후반에서야 또 한 번 크게 깨달았다고나 할까…

아무튼 그 분들도 나름의 스트레스 해소법이 있을테지만(있다고 믿고싶다) 제가 보기에 그분들은 취미도 컴퓨터하기인 것 같습니다.
이게 어떤 느낌이냐면, 어떻게 공부가 취미일 수 있지? 이런 느낌이랄까.



말이 쉽지

조금 더 정제해서 얘기 해보면- 내가 이것저것 다른 취미생활로 시간을 보낼 때 그 분들은 컴퓨터 공부를 한다는거죠. 정말 숨쉬듯, 습관처럼 합니다. 알고리즘 문제를 풀든, CTF 문제를 풀든, 취약점을 찾든, 취미로 토이프로젝트를 진행하든, 사람들 모아서 스터디를 하든. 아무튼 그렇습니다.

인생이 게임과 같지는 않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점은 비슷한 것 같습니다.
열심히 시간 투자해서 얻은 경험치로 스킬을 레벨업 할 수 있는 포인트가 주어졌을 때, 스킬을 몰빵해서 찍으면 당연히 그 스킬에 ‘특화’ 되는 것 처럼.
현실도 비슷합니다. 자기가 시간내서 투자를 많이 한 것을, (보통은) 잘 하게 되니까요.

여튼 내 정체성은 잡캐입니다. 근데 뭐 하나는 잘 하고 싶다네요.
도대체 나는 이 잡캐라는 내 정체성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잡캐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순간

심리학자 퀴블러 로스가 정의한 상실의 5단계는 다음과 같습니다.


1단계 : 부정
2단계 : 분노
3단계 : 타협
4단계 : 우울
5단계 : 인정



엉엉엉엉엉엉ㅇㅇ엉어엉ㅇ

경험상, 잡캐인 제가 잘 하고 싶은게 생기고서 저 단계를 비슷하게(?) 겪습니다.
그 시기의 일기를 쭉 요약하보면(아비규환입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1단계 : 하하하핳ㅎㅎㅎ내가 잡캐일리없엏ㅎㅎㅎㅎㅎ 그럼그럼ㅎㅎㅎㅎ (일단 정체성 부정, 게슈탈트붕괴가 옴)
2단계 : 이런 (심한욕) 나 졸라 컴퓨터 못하네 (심한욕) (여전히 취미생활 즐길거 다 즐기고 있음)
3단계 : 도대체 뭐가 잘못된거지?ㅠ 그래도 이정도면 노력하는거 아닙니까? (이때쯤 여전히 취미생활을 다 즐기고 있는 나를 발견하지만 외면함)
4단계 : 아……….나 컴퓨터 그만할까봐……졸라못하네 시바…… (우울하다는 핑계로 취미생활 즐길거 여전히 즐김)
5단계 : 아 나 잡캐임. 내가 잡캐인걸 뭐 어쩌라고. ㅇㅈ


세상의 모든 잡캐가 저런 과정을 겪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저의 경우가 그랬다는 것이죠.
또, 5단계를 거쳤다고 번뇌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더군요ㅋㅋ (요즘 현실이 번뇌임)


취미생활이 많은 것이 나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저의 경우에는, 잡캐인 내가 컴퓨터를 잘 하려면 수많은 취미 중에 하나둘 정도는 줄이고 그 시간에 컴퓨터를 조금이라도 더 해야겠군, 이라고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렸을 뿐입니다.

물론 생각만 하는 건 쉽습니다.



그러게. 사는거 왜이렇게 어렵냐.



가늘고 길게 (일단은) 해보기로 했다

나름대로 저런 결론을 낸 가장 큰 이유는,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한정적인 자원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시간이 무한정으로 있었으면 저런 결론 안냈을거야……….)

요새 가장 큰 바람은 그냥 내가 오래토록 즐겨온 취미들처럼, 컴퓨터도 그냥 오래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쯤 됩니다.

글 제목이 잡캐의 쓸모를 찾아서 인데, 사실 저는 아직 잡캐의 쓸모를 찾지 못했습니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저의 정체성이 잡캐인 것을 인정하고 여전히 제 취미생활도 사랑하지만, 문득 ‘내 취미는 컴퓨터를 잘 하는데 하등 도움이 안돼!’ 라는 생각이 수시로 들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이게 남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라고 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철들었다고 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어차피 결혼하면 컴퓨터 관둘거 아니냐(…) 하기도 하고, 아무튼 여전히 여러 말을 듣고 살지만, 어쩌겠습니까. 제가 잡캐고, 잘 하고 싶은게 생겼고, 어쩌다보니 컴퓨터고, 좀 해보겠다고 마음먹는게 나쁜건 아니잖아요ㅇㅅㅇa…..?



누가 쓰셨는지는 몰라도 인생의 지침으로 삼고 있습니다. 띵언 ㅇㅈ

요새는 취미 많고 흥미가 많아 이거저거 하는 사람들을 ‘다능인’ 이라고 하는 모양입니다.
제가 다능인인 것 같지는 않지만, 스리슬쩍 다능인과 관련한 ted 강연을 보면 어쨌든 이거저거 하는 것도 다 어딘가엔 도움이 된다고 하니, 저의 많은 취미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은 되도록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가까운 시일 내에 잡캐의 쓸모를 찾으면 좋겠지만 제가 하는 걸 봐서는 갈길이 좀 먼 것 같고.
그냥 먼 훗날에도 컴퓨터 하는 잡캐로 살고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뭐 언제 또 마음이 바뀔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지금은 그렇습니다.




마치며

말하고자 하는 바에 비해 글이 참 조잡하게 길어졌는데, 조잡함이 이 시리즈의 모토입니다.(?) 이 글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담(?)에 기반한 글이고, 앞으로 (차마 버리지 못한) 잡캐의 취미생활에 대해 이것저것 써 올리기 위한 나름대로의 떡밥일 뿐입니다. 이 글보다는 다른 선원들의 롸업이나 연구일지가 훨씬 더 도움이 됩니다.

제 잡캐 인생에 여러모로 조언을 해주신 분들께 소소한 감사의 말씀을 전하며,

…조만간 시시껄렁한 2편으로 돌아오겠습니다. ㅇ>-<






고민의_현장.png




아디옷쓰!!

comments powered by Disqus